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서론

  이것은 능력주의를 잘 설명해주는 명제이다. 공평하고 공정하며 심지어는 정의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능력주의 대한 일말의 의심조차 없이 전적으로 동의했었다. 샌델은 아메리칸드림 즉, 평등한 기회를 기반으로 누구든 노력하는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은 이제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공부나 배움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진실성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보게 되었다. 마이클 샌델은 나의 사고를 전복시켰고 특별한 지적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의 본질적 한계를 바라보고, 더불어 우리가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지에 대해 제시해보고자 한다.

 

 

본론

  능력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며 공정하다. 능력주의는 ‘우리는 우리가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을 갖는다’ 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나의 성공이 스스로의 덕이며 재능과 노력으로 성취한 것으로 그것은 자랑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주어진 결과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적으로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가 단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학력주의이다. 서연고서성한. 한국 대학은 서열화되어있다. 대학의 서열화가 옳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 보다 인서울 대학과 지방대학, 고졸과 대졸의 사회적인 인식의 차이를 주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게 왜 문제라는 것인가. 공부 잘하는 학생이 소위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지 않는가. 공정한 기회를 통해 성공하고 얻은 노력의 결실은 인정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다. 이 말이 과연 옳은 것인가. 능력주의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허점도 있다. 공평한 기회제공과 능력발휘 보장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고 능력주의를 방해하는 요소의 통제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능력주의가 과열되면서 학력주의로 변질되었다. 한국도 매한가지이다. 학력주의가 과도해지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입시폐단, 계층의 세속화, 계층간 소득격차 등 이다. 이는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에서 비롯된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많은 문제점 중 사회적 편견와 사회연대의 약화에 주목한다.

  학력이라는 잣대가 사회적 인식 판단의 기준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를 부패시키며 능력주의는 무너진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학위를 갖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학력에 부여된 가치를 더욱 증대시키는 동시에 승자와 패자 간의 계층분화를 강화시킨다. 사회적으로 좋은 학력을 가진 사람은 승자가 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패자가 된다. 그리고 학력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보장하는 기준이라고 믿는다. 패자는 자신의 실패를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을 갖고 인정하게 된다. 이때 비학위자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과 학위자가 비학위자를 향해 갖는 오만함이 발생한다. 특히 샌델은 능력주의 중심 사회의 내재된 이 ‘모욕의 감정’(내적인)에 주목한다. 사회적 편견은 실패한 가장으로서 가지는 고통, 계층 전체에 대한 모욕의 고통을 만들어 낸다. 이는 교육받지 못한 이들은 깔봄을 당해도 싸다는 편견을 만들어내며 성공한 자들의 교만한 마음을 정당화시킨다. 이렇게 승자와 패자의 계층이 분화되고 세속화되며 학력의 가치가 더욱 높아져 학력주의가 더욱 치열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사회적인 연대는 점점 약화되고 편견과 불공정한 경쟁만이 남게 되며 사회문제를 가져온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완벽한 실현은 불가능하다. 사회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도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지는 확실치 않다. 동일한 노력을 해도 시장이 반기는 재능이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자들이 있게 된다. 개인의 재능과 시장이 원하는 재능이 동일할 수 없으며 어떠한 재능을 갖는지는 통제불가능하다는 것 즉, 우연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굴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보상들을 쟁취할 때에 그것이 개인의 노력의 전적인 결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계층을 나누고 경쟁하는 것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회사에서도 인생 전체를 봤을 때도 적용된다. 부유하고 성공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한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인해 거둔 성취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신의 축복인지, 그냥 어쩌다 태어나서 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서있다.’ 이런 겸손함을 갖을 때 비로소 능력주의의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벗어나서 사회연대, 겸손, 나눔, 존중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결론

1.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겸손하고 감사하자

  ‘내가 가진 것은 물론 이뤄낸 성취, 습득한 지식조차 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많은 것들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의 가정에 태어난 것, 내가 만난 인연들, 모든 환경이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것들이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개인의 책무이지만 그 이면의 무엇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종교인이라면 ‘신의 은총’, 그렇지 않다면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재능, 상황, 환경,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겸손과 감사함을 가져보자.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이 성공하고 잘났다고 자만하지 않고 타인의 결점, 부족함, 실패를 조롱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실패조차 미워하지 않고 온전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참 불공정하기에 감사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경쟁을 위한 경쟁이 아닌 사람 자체에 집중하자.

  인간은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올바르게 생각하고자 하여도 우리에게는 무의식적 편견을 완전히 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편견을 한쪽으로 재쳐두고 개인을 온전히 바라보려는 사회적, 정치적, 개인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사유의 힘이기 때문이다.

  능력 경쟁을 위해 온갖 무장을 한 사람보다는 학위가 없지만 우리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 자신을 일을 통해 사회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떤 학력, 경력, 스팩을 가졌는지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라고 물을 때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더 올바른 사유를 위해 끊임없이 독서하자

  ‘능력주의가 옳은 거지. 공평한 기회를 주고 각자 재능을 발휘하고 노력해서 그 결과에 따라 보상하는 것. 그것보다 옳은 게 어딨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첫 쳅터를 읽으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능력주의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갔고 내가 생각하던 능력주의에 대한 틀을 깨고 더 커다란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옳고 그름으로 확정 지을 수는 없다. 옳으면서 그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키우는 방법의 으뜸은 단연코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끊임없이 독서 하며 나의 가치 위에 생각을 더해나갈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다시 한번 독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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